양첩제_by 성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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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가 함께 시집가는 방식 : 양첩제
  잉첩제는 원시 사회의 족외혼이 대우혼으로 발전하는 과도기 형식이다. "옛날  딸을 시집
보낼 때는 반드시 조카딸이 따라갔는데, 이것을 잉이라 한다"라고 했듯이,잉첩제란 한 여자가
출가할 때, 같은 성을 가진 여자 동생과 노비가 함께 시집가는 것을 말한다. 가령  맏딸과
결혼하는 남자는 그 여자의 일정한 나이가 찬 자매 또한 아내로 맞이할 권리가 있었다. 잉첩은 
정실부인은 아니지만, 지위는 첩에 비해서는 높았으니, 정부인과 첩의 중간층이었다.
  최초로 자매가 함께 시집간 예는 요임금이 두  딸을 순임금에게 준 것이다.(요와 순은 모두
전설 속의 원시 사회 후기의 인물로 대우혼이 개체혼으로 향하는 과도기에 살았으며, 한번에
두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후대의 잉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하나라의 다섯번째 군주 소강
은 즉위하기 전에 우유씨의 백정이었는데, 우사의 두 딸을 동시에 취했다. 은상 시기로 들어서
면서 잉첩제는 제도화되어 성행하기 시작했다. 시집갈 때 동행하는 여성은 대부분 친동생이었
으며, 그것은 보편화된 것이었다.
  i) 언니를 출가시키면서 여동생을  함께 보내면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처럼 멀리 갈 수 있어
길하다.
  ii) 여동생은 언니를 따라 출가하지만, 언니는 동생 같지 않기 때문에 반대로 잉이 되어보내
진다.
  iii) 제을의 시집간 딸, 언니의 시집갈 때 입은 옷은 동생이 시집갈 때 입은 옷보다 아름답다. 
춘추 시기에도 잉첩제가 성행하였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가령 [시경,대아] "한혁"의
"한후가 맞이하는 배필될 이... 뒤따르는  아홉 명의 신부들"이라든가, [빈풍]"칠월"의  "여인
네 마음 서글퍼지니, 공자님과 함께 시집가고 싶다네"는 잉첩제를 말한다. 여기서 "공자"는 빈
공의 여자이며, 서글픈 마음을 지닌 여자는 조카딸과 여자 몸종이다. 또 "위장공은  또 진나라
에서 아내를 취했는데, 이름이 역규이며, 효백을 낳았다... 역규의 동생 대규는 환공을 낳았다"
는 것 또한 한 실례이다.) [좌전, 희공 17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제나라 제후의 부인은 세 
명이었는데, 왕희, 서영, 채희에게는 모두 아들이 없었다. 제나라 제후는 여색을 좋아하여 
많은 여자를 총애했는데 부인처럼 사랑받는 여자[즉 잉첩]는 여섯 명이나 되었다. 자위희는 
무맹을 낳았고, 소위희는 혜공을 낳았으며, 정희는 효공을 낳았고, 갈영은 소공을 낳았으며,
밀희는 의공을 낳았고, 송화자는 공자 옹을 낳았다.
  잉첩은 또 여자쪽과 같은 성을 가진 국가의 조카딸이나 여동생을 포괄하기도 한다. 춘추시대
노나라의 송공희에게는 세 나라에서 온 잉이 있었고, 관중에게는 세 성의  여자가 있었으며,
진백납에게는 다섯 명의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노나라의 백희는 송공공에게 시집을 갔는데,
본국의 조카딸과 여동생 이외에 노나라와 같은 성의 국가인 위, 진 두나라에서도 잉첩을 보냈다.
어떤 때는 다른 성을 가진 나라에서 잉첩을 보내기도 했다. 대부가 아내를 얻을  때도 조카딸이
나 여동생과 같은 성을 가진 나라의 잉첩이 있었다는 기록도 관심거리다. 가령 노나라 장선숙은
아내가 두 아이를 낳은 후 죽자, 아내의 조카딸을 정실로 삼았다.([의례,사혼례]에 "수무제, 잉
선"의 예가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일의 흔히 었었음을 말한다.)
  잉의 숫자에는 제한이 없었는가? 이 점은 여성의 성 능력과 연관되므로 주의해야 할 문제이다.
  천자가 황후를 취할 때 세개의 제후국에서 잉첩을 보내 오는데, 각 나라에서 세 명,  왕후가
데리고 오는 두 명의 잉, 총 열두 명이 따라오게 된다.
  제후가 한 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할 때, 두 나라에서는 잉을 취하고, 또 각각의 질,제종을 취
한다. 질은 형의 자식이고, 제는 동생이다. 제후는 한번에 아홉 여자를 맞는다. 또 이 세 여자
는 각기 두 여자를 데리고 시집을 온다. 그래서 아홉 명의 여자가 되는 것이다.
  춘추 전국 시대 경대부의 지위는 제후들보다 낮아 다른 나라에서 잉을 보내는 일이 없고, 단
지 시집오는 여자의 조카딸과 여동생만이 따라왔다. 때문에  "대부에게는 두 명의 잉이 없었으
므로 조카딸과 여동생을 잉으로 삼았고," "선비는 한 명의 아내와 한 명의 첩이 있을 뿐 잉을
두지 못했다."물론 선비계층에도 잉첩제가 존재했었는가 하는 문제는 논쟁이 되고 있지만 말이
다.
  이들의 성생활에는 일정한 규칙이 정해져 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첩이 비록 늙었을지라도 나이 50이 안되었으면 반드시 닷새는 모신다. 50이 찼으면  모시지
않는다.
  이것은 여성의 성적 권리를 가리킨다. "닷새를 모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오일일어"는 제후의 제도이다. 제후는 아홉 여자를 취하는데, 조카와 동생 두 명이 모시는
것이 사흘이고, 다음으로 두 잉이 나흘째를 모시며, 그 다음 부인이 밤을 모셔 오일이 된다.
  비록 고대의 부부들은 잠자리를 제외하곤 서로 접촉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잠자리에서만큼은
남자는 여자에게 예의를 갖추어야만 했다. 즉 남자는 많은 수의 아내들 가운데 한 명이라도 성
적으로 소홀히 해서는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아내나 첩과 성행위를 할 수 있는
횟수와 순서조차도 엄격하게 정해졌다. 이런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시기는 남자 
나이가 70세가 되었을 경우다.
  간혹 신부들 중에는 잉첩을 데리고 가지 않으려고 하는 이도 있었으며, 반대로 잉첩의 신분이
면서도 신부와 함께 가는 것을 기뻐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시경,국풍,강유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강물은 갈라져 흐르고
  아가씨는 시집을 가는데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네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뒤에 후회하게 되리

  강물 옆에 늪이 있고
  아가씨는 시집을 가는데
  나와 함께 하려 않네
  나와 함께 하려 않지만
  뒤에는 함께 살게 되리

  강은 지류가 많고
  아가씨는 시집을 가는데
  내게는 들리지도 않네
  내게는 들리지도 않지만
  탄식하며 노래 부르리
 
  이 시에서 "강물은 갈라져 흐르고"라는 것은 잉첩과 남자와의 이회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잉첩과 남자 주인과의 관계는  혼인 관계이지 결코 정통 예법에 따른 것은 아니다. 정현은  "
혼인의 도는 시집가고  장가드는 예를 말한다"고 했고, 이로부터 공영달은  "남자는 저녁 때 
여자를 맞으며, 여자는 남자 때문에 온다"라고 부연 설명했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혼인의
주지는 예의에 입각한 혼취에 있다. 즉 남녀가 동거하여도 예의에 부합하지 못하면 혼인 관계는
형성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잉첩은 주인과 양성 관계에 있으며, 사회적으로 그들의 성행
위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잉첩제 또한 일종의 혼례 제도인 것이다. 이것은 일부 이처제의 혼인
형태에 속하는 특수한 혼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잉, 첩제는 불합리한 혼인 제도라는 점에서
폐지할 것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역경, 혁괘] 단에서 "물과 물은 서로 숨쉬게 한다.
두 여자가 함께 기거하면 그 뜻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데, 이것을 혁이라한다"고 했지만 큰 효과
를 얻지 못했다.)
  참고적으로 잉에는 흔히"잉싱"이라고 하는 남성 노비가 있었다. 은나라의 명재상 이윤은 유신
씨의 딸이 상나라 탕에게 시집갈 때의 잉신이었으며, 진목공을 도와  패업을 이룬 백리해 또한
일찍이 잉신을 지낸 적이 있다.
  잉첩제는 한대에 이르러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한대  사람들이 일부  일처제를
엄격히 지켰다는 말은 아니다.  한대에는 부부  이외의 성생활은 잉첩과 비슷한 부류의  애첩에
의지하였는데, 이 당시의  애첩 이름으로는 "소첩", "소부", "소부",  "방처", "하처", "외부"등
이 대표적이다.(소첩의 예를 보면, 서한 시기 사부가 매승은 양나라에 있을 때, 소첩 한 명을 맞
이하였는데, 이름이 고모이다. 매승이 동쪽으로  돌아올 때, 고모가 따라오지 않으려고 하자, 매
우 화를  내며 수천금을 주어 그녀를  남겨 두고  어머니와 살도록 했다. 또  [한서, 영행전]을
보면, 장팽조는 소첩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한다. 방처의 지위는  낮은 편이고, 하처는 낮은 비첩
의 총칭일 가능성이 있으며, 외부는 오늘날의 정부와 유사한 것으로 그  사회에서는 인정하지 않
았을 수 있다. 그리고 한대 소처, 방처는 단 한 명에 그친 것이 아니다. [한서, 원추전]에서는 "
왕이 술과 색을 좋아하는 것은 금했지만, 첩은 많이 취했다."라고 했고,   [후한서, 양절왕창전]
에서는 "신 창에게는 37명의 소처가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 당시  자식이 없어 첩을  들이는 일
은 민간에서도 흔히  있었다. [의림] 및 [태평어람], p.388과 p.366에서  인용한 [풍속통]에서는
"진류 지방의 한 부유한  집에는 90세가 되었으나 아들이 없자 농부의 딸을 첩으로 맞았다"고 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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